문경새재와 관련된 이야기
1.문경새재와 산신령
조선 태종 때 처음으로 조령의 길을 개척할 때의 일이다. 문경현감이 긴급히 조정에 치계하여야 할 중대 안건이 있었다. 현감은 요성 역졸 중에 신체가 건강한 역졸을 골라서 조정에 상계할 장계를 가지고 급히 다음 역까지 체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현감의 명령을 받은 역졸은 다음 역을 향해 문경새재를 넘어가는데 새재의 중간지점에 이르렀을 때 호환을 당하였다.
문경현감은 체송간 역졸이 호환 당한 줄도 모르고 조정에 상계하였으니 그 비답만 내릴 줄 알고 기다리고 있던 차 조정에서는 문경현감에게 관계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하라는 엄명이 내렸다. 문경현감은 깜짝 놀라 요성역으로 가서 체송한 역졸을 호출하였더니 그 역졸은 지금까지 귀임하지 않고 행방불명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실을 안 현감은 즉시 그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호령하고 그 역졸의 행방을 탐색하기 위해 문경새재 일대를 수색한 결과 호랑이가 먹다 남은 신체 일부와 행장이 발견되었다.
현감은 또 다시 지연된 사유와 아울러 조정에 사건의 경위를 상보했다. 이 장계를 받은 태종은 대노하여 즉시 봉명사를 차원하여 문경새재 산신령을 잡아오라는 엄명을 내리셨다. 봉명사는 주야배도하여 문경새재에 도착하여 산신령을 포착하려고 하나 산신령을 잡을 묘안이 나지 않았다. 궁여일책으로 새재 산신사에 제문을 지어 치제한 후 제문을 불사르고 혜국사에 머무르면서 하회를 기다렸다. 그날 밤 만월로 월광이 교교하여 잠도 못 이루고 전전반측하고 있는데 삼경쯤 되어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호랑이 울부짖음이 일어나더니 잠잠해진다. 그 이튿날 새재 산신사 앞마당에 여산대호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봉명사는 그 호랑이를 박피하여 태종대왕께 호피를 바치고 사실을 상주하였다.
그후부터 문경새재에는 호환이 사라졌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 전진공(문경전씨 2세조)이 혜국사에 유숙하여 있는데 그의 꿈에 새재 산신령이 현몽하기를 '나는 새재 산신령이요 나라에 득제하여 아직 면죄를 못 받았으니 그대가 나를 위해 나라에 상소하여 억울한 죄명을 씻어줄 수 없겠는가?'하고 간청했다. 그는 쾌락하고 즉시 새재 산신령에 관한 사죄상소를 올렸더니 태종께서 친히 비답을 내리시어 새재 산신령의 죄를 사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2.달성판관의 명판결
옛날에는 신임사또가 임명되면 육방관속이 그 본가까지 모시고 왔었다. 어느 시대 서울 사는 가난한 선비가 과거에 급제했고 얼마 후 달성 판관으로 임명된지라 달성의 육방관속은 관례대로 사또를 모시러 갔다. 신임 사또가 인물이 어떠하며 성격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한마음에 급히 사또 집을 물어 찾아가니 기대와는 딴판으로 사또의 키는 5척도 못되는 단구요 거기다 얼굴까지 빡빡 얽었고 나이도 겨우 스물이 넘을락 말락하는 애송이로 도무지 볼품이 없었다.
육방관속들은 별 것 아니구나 속으로 만만히 보며 함께 내려오는데 문경새재에서 쉬어가게 되었다. 그때 찢어진 갓을 쓰고 남루한 옷차림의 어린 상주가 사또에게 울면서 딱한 사정을 하소연하였다. 내용인즉 가난한 살림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비용을 마련키 위해 상주의 몸인데도 닭 다섯 마리를 팔러 장에 나왔다. 평생 물건을 팔러 시장에 나온 것은 처음이라 어떻게 파는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있으려니 한 장수가 가까이 와 자기가 맡아 있다가 팔아주겠다면서 상주의 닭 다섯 마리를 자기 닭장 속에 집어넣었다. 한나절을 지나 그 닭 장수에게 맡긴 닭을 달라니 맡은 일조차 없다고 잡아떼 본관사또에 이 사실을 알리고 닭을 찾아 달라했더니 "이놈 네 닭을 내가 어찌 안단 말이야" 고 호통만 칠 뿐 찾아줄 생각을 않는다는 것이다. 얘기를 다 듣고 난 달성판관은 곧 사령을 보내 닭 장사를 잡아오게 했다. 상주에게 자기 닭을 찾아라 하니 여러 마리 중에서 하나 하나 골라낸다.
사또가 먼저 닭 장수에게 물었다. "이놈 저 닭이 정녕 네 놈 것이 이라면 저 닭에게 아침에 뭘 먹였느냐" 닭 장수는 쌀, 보리 등 온갖 것을 주어 섬기며 횡설수설한다. 상주에게 다시 물으니 아무 것도 먹일만한 것이 없어 집에 있는 수수 한줌을 먹였다는 대답이다. 다섯 마리 중 한 마리를 잡으니 과연 수수가 나왔다. 닭 장수는 꼼짝못하고 백배 사죄한 후 그를 얼러 닭 값을 열배나 물게 하고 문경 본관사또에게 5백냥을 빌어 상주에게 장례비용으로 쓰도록 마련해 주었다. 교묘히 사건의 곡절을 가려내는 판관의 기질을 본 육방관속들은 혀를 내둘렀고 경멸이 여겼던 것을 뉘우쳤다.
달성판관이 부임한 후 여러 달이 지나도 문경사또에게 빌린 돈 5백냥을 갚지 않자 문경사또가 사람을 보내 돈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달성판관은 심부름 온 사람을 불러 "돈을 벌써 갚았는데 네 고을사또가 그렇게 정신이 없으시냐"고 되려 나무란다. 심부름꾼이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자 사또에게 돌아가 대전통편 몇장 몇조를 보면 알 것이라 이르도록 했다.
대전통편 그 장은 본래 자기 고을에서 일어난 사건을 본관사또가 처리 못했을 때는 사또가 벌금을 5백냥을 물도록 규정한 것이다.
달성판관은 그것을 이용, 5백냥을 빌린다고 받아 불쌍한 상주에게 도움을 베풀고 똑똑치 못한 사또를 그 나름대로 징벌한 것이다.
3.문경새재와 신립장군
신립 장군은 1546년에 태어나 자는 입지이고 시호는 충장이고 본관은 평산이며 생원 화국의 아들로 2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도총 도사 경력 진주판관을 거쳐 은성부사가 됐다.
육진을 괴롭힌 니탕개를 두만강 건너 소굴까지 가서 소탕하고 함경북도 병사로 승진했으며 니탕개를 잡아죽이는 등 전공이 혁혁하여 평안병사를 거쳐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임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선조가 친히 검을 하사하며 격려하였다. 같이 간 김여물이 조령에 진지를 구축하고자 건의했으나 적이 이미 고개 밑에 당도하였으니 고개에서 부딪치면 위험하고 우리 병정은 아무 훈련 없는 장정들이라 사지에 갖다 놓지 않으면 용기를 내지 않을 것으로 알고 천험의 요새인 새재를 버리고 달천에 배수진을 쳐서 장열한 전사를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임란을 당하여 영남의 패보가 서울에 도달하자 조정에서는 대경실색하였다. 선조대왕께서는 신립 장군으로 하여금 모병 대적하게 하고 일방 순변사 이일 장군을 상주에 급파하여 방어케 하였다.
대치중인 왜장 소서행장은 임진 4월 24일 상주를 포위 공격하자 중과부적으로 이 장군은 대패하여 문경 조령으로 진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 중도인 당교에서 남하하는 신 장군과 만나 대패한 사실을 전하고 신 장군과 함께 문경으로 회군하여 방어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제장을 소집하여 작전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회의를 주제하는 신 장군 앞에 한 도승이 나타나 천험의 요새인 조령에 포진반격을 가하면 왜적을 격퇴할 수 있다고 간곡히 진언하였다. 그러나 신 장군이 인솔한 병사는 충청도 태생으로 산악전에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사기가 저하되어 평야인 충청도 지대에서 적을 격퇴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주장이 많으므로 신 장군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유예미결하고 있었다.
그 때에 신 장군의 소식에 장군을 사모하다가 함원자결한 처녀의 원귀가 장군앞에 나타나 "신 장군은 대명을 받아 왜적을 격멸하는데 있어 어찌 이와 같이 협착한 새재에 포진하여 후세의 조소거리가 되게 하시나이까 충청도 달천의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면 크게 대승하리라" 말하니 새재에서 싸울 마음이 없던 충청도 출신 장병들이 떠들고 일어나는지라 신 장군은 요사스런 원귀의 말을 믿고 부장 김여물 등은 회군의 불가함을 극간하고 조령방어책을 주장하였으나 신 장군은 그 계략을 묵살하고 충주 탄금대에 포진하였다. 왜적과 대진한 신 장군과 전 장병은 순사 대패하고 말았으니 조령을 사수하였던들 임란의 양상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4.문경새재 성황사와 최명길
최명길은 조선조 인조 때 강화파의 대표적인 정객으로 자는 자겸, 호는 지천이고 전주인이다. 좌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으로 정사원훈 1등공신에 완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최명길이 소시에 안동부사로 있는 외숙께 문후차 안동으로 갈 때 조령을 통과하였다.
그때 용모가 단정하고 자색이 아리따운 젊은 여인이 뒤를 따라 오면서 "험한 산길이라 여자 혼자 무서워 갈 수 없으니 동행할 수 없겠습니까?"라고 말을 건넸다. 최명길은 성격이 호방한데다가 젊은 여인이 동행을 원하는지라 쾌히 승낙하고 같이 동행하면서 그 여인의 정체가 궁금하여 마음속에서 살피고 있었다.
앞서가던 여자도 그 눈치를 차렸는지 뒤를 돌아보고 방긋이 웃으며 "공이 저를 의심하는 모양이니 내 정체를 말씀하리이다. 저는 사람이 아니고 새재성황신인데 안동사는 좌수 모(某)야가 서울갔다오는 길에 성황당 앞을 지나면서 성황당에 걸려 있는 치마를 보고 욕심을 내어 치마를 훔쳐 제 딸년에게 주었으니 이런 고약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좌수 딸을 죽이러 가는 길인데 우연히 공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고 말을 하면서 최명길의 눈치를 살핀다. 최명길은 마음속으로 놀랐으나 태연자약하게 "인명은 재천인데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소" 하면서 용서할 수 없느냐고 말했다. 그 여자는 한참 대답이 없더니 "공은 미구에 정사공신으로 영의정에 오를 몸이요, 병자호란이 일어나는데 공은 큰공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명나라는 망하고 청나라는 흥할 것이니 부디 청과 화친하여 이 나라 사직을 보전하셔야 합니다. 오늘 좌수의 딸을 죽일 것이되 공의 체면을 봐서 징벌을 할 것이니 공은 이렇게 하여 제 체면을 세워 주시오" 하고는 간 곳이 없었다. 최명길은 이상히 여기고 급히 서둘러 안동 모 좌수 집을 찾으니 좌수 딸이 급사하여 집안이 발끈 뒤집혀 경황이 없었다. 최명길은 주인을 찾아 인사를 나눈 후 "딸을 내가 회생시킬 수 있으니 딸 있는 방으로 안내하시오?"라고 말했다. 주인은 죽은 딸을 살리겠다니 감사히 여겨 최명길을 딸 방으로 인도하였다.
새재서 본 성황신이 좌수의 딸의 목을 누르고 있다가 일어나면서 "이제야 오십니까?" 하고 인사를 한다. 성황신과 최명길의 대화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나 성황신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문경새재 성황당에서 가져온 치마를 빨리 불사르고 깨끗한 음식을 장만하여 치제하면 딸이 회생할 것이니 염려 마시오"라고 말하자 좌수는 백배사례하고 최명길의 말대로 치성하니 딸이 다시 살아났다. 그 후 과연 최명길은 벼슬이 차츰 올라 영상이 되고 병자호란때 중의를 물리치고 당시 정세를 잘 파악하여 치욕을 참고 화청정책을 채택하여 국난을 수습한 사실은 새재성황신과 관련된 인연이었다는 사화가 구전되고 있다.
출처 : 문경새재도립공원